1. 창설배경
처음에 SS 나치 친위대는 친위병력이 아닌 단순한 당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를 경호하기 위해서 기존에 있던 SA 돌격대의 산하 조직으로 1925년에 창설되었다. 하지만 이후 히틀러의 왼팔이나 다름없었던 하인리히 히믈러가 SS라는 조직을 맡게 된 뒤부터 세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으며, 그는 SA의 지도자 룀과는 틀리게 히틀러를 우상처럼 심하게 찬양하고 다녔고 결국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SA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첩보를 그의 부하들로부터 들은 히틀러는 전과자였던 부하를 시켜 SA의 대장인 룀을살해한뒤에 SA를 해체할 것을 명령하였고 해체 뒤에 SS 나치 친위대는 급속히 부상하게 되었다.
2. 무장친위대의 탄생
이후 1935년 급속히 군비를 늘리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나치 독일은 SS 무장 친위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선발 조건은 당의 이념에 충실하고 히틀러를 최고의 우상으로 여기며 게르만인의 피가 섞여있어야 된다. 이들은 SS가 되기 위해서 따로 다른 전용 사관학교에서 고강도의 훈련을 받아서 현재의 개념으로 따지면 특수부대 정도였다. 가장 큰 창설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독일 국방군의 반란이나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날 수 있는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만든 조직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3. 역할
이들은 히틀러의 총통관저 경호와 KGB와 같은 비밀경찰의 역할부터 시작해서 따로 기갑사단을 조직하여 최정예 병력으로써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독일 본토 내와 점령지를 돌면서 하는 인종청소였는데, 예초에 극우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독일인들만 조직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태인들과 공산주의자와 좌파 지식인들과 집시 그리고 유색인종들을 색출하는데 굉장히 적극적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불린 사람들은 총살당하거나 가스실로 들어가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4. 후반기
후반기인 1944년부터는 독일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연합군들에 의해서 패배를 당하고 있으며 예초에 쓸만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병사로 징집되었고 거기에다가 연속적인 패배로 정권의 지지율도 나빠져서 SS 나치 친위대에 지원하려는 사람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에는 게르만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있으면, 인도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폴란드인이든 간에 원하면 무장 친위대에 입대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나중에는 흑인과 아시아인과 심지어 무슬림들까지도 입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네오 나치였는데 알고 보니까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안 멍청이들도 많이 입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5. 연합국의 대우
SS 나치 친위대는 일반적인 독일 국방군들보다 포로로서의 대우가 열악했다. 특히 영국군과 미군에는 유대인 병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색출되어서 즉결 처분을 당하거나 죽을 때까지 맞았다. 그리고 악명 높은 시베리아로 끌려가면 강제 노역뿐만 아니라 정치적 개조인 녹화사업의 대상자가 되었으며, 한 번은 이들이 먹을 식량에 누군가 독을 타서 SS 포로 전원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고 사실상 이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많아서 식사시간이 되도 먹으라고 부르지 않고, 날씨가 추워져도 여름철에 입는 옷을 그대로 입히는 등 대부분 1년도 되지 않아서 질병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