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공방전 - 나치독일의 최후의 전투
베를린 공방전은 1945년 북부 노르웨이와 아주 조금 남은 잔여의 영토를 제외한 오직 베를린만이 남은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나치 독일을 항복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사상 최대의 화력을 동원해서 벌인 제3제국의 마지막 전투이다.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제3제국은 여성과 아이들까지 병사로 징집하여 최후의 발악을 해보지만 기관단총과 수천 대의 기갑차량으로 무장한 소련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 배경
1945년, 서쪽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연합군들이 유유히 진격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붉은 군대와 막 해방된 폴란드군과 그리고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가 한순간 배신을 하고 연합군 편에 들어간 루마니아와 헝가리가 제3제국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독일군은 숙련된 병사들은 6년간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을 잃었으며, 공장이 있는 수많은 영토를 빼앗겨서 보급품을 생산할 수도 전차를 생산할 능력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나치 독일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매전 투마다 패배하면서 후퇴했으며, 결국 대부분의 병력이 마지막 방어 지인 베를린에 모였다. 소련군은 이를 함락시키길 원했으며 얼마 안 돼서 베를린 공방전이 시작된다.
2. 방어준비
단치히와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독일의 주요 도시를 붉은 군대가 모두 장악했을 때 이들은 마지막 목적지인 베를린을 공격하기 위해 재정비를 하고 있었고 이 기간 동안 나치 독일은 약 2주 정도 방어시설을 구축할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이들은 차체가 망가지거나 격파당한 전차들을 시가지의 땅속이나 벽돌에 묻어놓은 뒤에 고정 대전차 포탑으로 사용했으며, 저수지의 물을 빼어서 늪지대를 형성해 소련군의 진격을 늦추려 하였다. 그 뒤 참호를 비롯한 각종 벙커와 대전차 야포 진지와 대공포들을 아주 세세하게 베를린 전 지역에 깔아두었다.
3. 전력차이
마지막 공격이 임박했을 때 양쪽의 전력 차이는 붉은 군대가 235만 명, 소련의 꼭두각시 국가인 폴란드군이 15만 명 그리고 장갑차와 전차 등 2600여 대 그리고 폭격기와 전투기 정찰기 등 7500대, 야포가 4만여 문 정도 되었다. 그에 비해서 나치 독일은 약 76만 7천여 명의 병력과 1500여 대의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2200여 대의 항공기 야포 9000여 문과 경찰과 히틀러유겐트 대원들이 8만 5천여 명 정도 있었다. 수적으로는 대략 3배 이상 차이 났고 전투 경험도 소련군이 훨씬 더 뛰어났다. 그에 비해서 나치 독일은 50세 이상의 시민들에게도 일회용 대전차미사일과 사냥총 등을 지급해주면서 총알받이로 썼고, 일부 여성과 12세 이상의 어린이들도 병사로 모집하였다. 또한 전차에 넣을 기름이 심각하게 부족하였고 항공기는 연합군이 이미 제공권을 장악하여서 있으나 마나였다. 전투가 임박하자 나치 독일은 1930년대에 개발한 구식 트랙터 경전차까지 박물관에서 꺼내서 배치시키고, 병사들에게 입힐 군복이 부족해서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구식군복과 철모까지 지급했다.
4. 전투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하기 직전 2~4만여 문의 야포와 카투사 로켓 발사차량들이 수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포탄들을 베를린을 향해 뿜어됐으며 그 양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서방 연합군이 사용했던 포탄의 양보다 많았다. 지상 병력들은 저수지로 인해 형성된 늪지대를 통과하느라 진격이 지연되었고 이후 엄청난 양의 전차들이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대전차 포와 미사일들이 소련군의 전차를 향해 발사되어서 수많은 붉은 군대의 전차가 격파당했지만 수적 우세로 그대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보병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하였고 엄청나게 조밀했던 방어선도 뚫려버렸다. 이 상황에서 독일 지휘부들은 히틀러의 과대망상 때문에 이미 전멸한 병력에게 명령을 내리고 함락당한 영토를 아직도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단정 지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후 빠른 속도로 베를린의 주요 시설은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점령지 내에서 간간이 생존한 잔존 독일군들이 의미 없는 저항을 하고 있었다.
5. 항복
이후 자기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 줄 몰라 두려움에 빠진 히틀러가 자살을 하고 그의 후계자인 칼 되니츠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칼 되니츠는 즉각 연합국들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이로써 나치 독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 소련군의 잔악행위
붉은 군대는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강간행위와 이유 없는 민간인 학살을 베를린에서 하기 시작했고, 5세의 여아부터 시작하여 80대의 노인들까지 소련군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그래서 이들 중에서는 차라리 아무 보상 없이 해를 당할 바에는 뭐라도 받고 하자고 생각하여 돈이나 음식을 대가로 성 상납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독일군 포로들은 모두 시베리아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생존한 사람은 수십만 명 중 1만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소련군의 만행을 피해서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쪽으로 도망쳤던 독일군들도 연합국들끼리 맺은 협정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보내졌다.